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어떻게 오게 된 것인가?(그리스문제의 이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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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어떻게 오게 된 것인가?(그리스문제의 이해) - 1

<아침이슬> 2010. 5. 16. 12:06



이 글은 아래 링크의 소버린 리스크의 확대가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기 위한 시리즈물 두번째글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 특히 2001년의 경제위기는 지금의 그리스와 너무나 흡사한 면이 많이 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80년대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 성과와 실패.




80년대 아르헨티나는 기존 농,축산업 중심의 경제형태에서 제조업 중심의 경제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에 따라 아르헨티나는 고금리롤 통해 국내 저축을 끌어모으고 그렇게 모은 리소스를 소수 재벌 기업에 집중적으로 대출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존 1차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개선하여 1차 생산품 가격에 따라 경제성장이 좌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고부가가치 창출을 통한 국민경제수준향상을 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수시장의 여력을 기업들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내수시장의 피폐함은 피할 수 없었고 통화 증발을 통한 기업 지원은 고인플레를 초래하여 금리수준도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중심 중화학 공업 육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에 따라 한국도 제 2차 석유파동 시기에 과다한 외채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IMF와 대기성 차관협약을 맺고 일본의 60억불 금융지원을 받게 된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웠던 것들은 역시 공공부문의 힘으로 육성된 기업들을 해외에 매각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제구조때문에 70년대 말 제 2차 오일쇼크가 터지고 전세계적 불황이 아르헨티나 경제 또한 강타하자 내수시장의 기반이 없고 고금리로 인해 금융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수출시장의 문제로 인해 기업들의 채산성이 극도로 악화되자 부실채권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파산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금융기관에 구제금융을 투입하고 이에 따른 재정적자를 고금리의 외채도입을 통해 보전하게 되는데 문제는 아르헨티나의 정치구조상 복지정책을 줄이고 재정긴축으로 전환하기가 어려워 금융부문의 스트레스 + 복지부문의 도덕적 해이 가 결합하여 과도한 재정적자를 이끌어 내게 된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정부의 재정적자 규모에 따라 아르헨티나 화폐가치는 점점 평가절하되게 되고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강력하게 아르헨티나 경제를 강타하게 된다.









2. 인플레이션 악순환과 달러 페그제



위에서 언급했듯 부실채권에 따른 재정적자 확대 --> 재정적자 보전을 위한 외채도입 --> 고금리로 인해 외채상환을 위한 채권 발행 --> 재정긴축의 미진함으로 인한 재정적자의 지속적 확대 --> 아르헨티나 화폐의 평가절하 --> 인플레이션 발생 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데 위에서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외채를 도입하지 않고 화폐 증발을 통해 재정적자분을 메꾸자 아르헨티나는 연 4000~5000%에 이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은 저소득층과 연금생활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게 되고 이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자 아르헨티나에서는 자국 화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해외 화폐를 장롱에 넣어두거나 해외 은행 지점에 예치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1989. 7 조기 취임한 메넴 대통령은 알폰신 전임행정부 말기의 경제 파탄의 주요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초인플레(연 4,900%) 억제와 환율 안정을 단기간 내에 이룩하기 위해 쇼크요법(shock therapy)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페론당의 전통적인 경제정책 수행패턴을 과감히 탈피하여 아르헨티나 최대재벌인 ‘Bunge & Bern’ 그룹의 부사장인 미겔 리아그(Miguel Riag)를 경제장관에 임명하고 경제정책에 관한 모든 사항을 동 장관에게 일임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1970년대 인접국 칠레에서 군사혁명 발생후 피노체트 대통령이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실물경제에 밝은 민간인 경제전문가를 경제장관에 임명하고 동 장관에게 경제정책에 관한 전권을 위임함으로써 칠레의 경제가 안정 속에서 계속 발전한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리아그 장관은 당면한 인플레 억제를 위해 우선 환율을 대폭 인상한 후 고정환율로 동결하고, 생필품 가격도 수개월간 동결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B.B정책’을 89. 7. 10에 전격 발표하고 추진하려 하였으나 7. 14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메넴 대통령은 B.B그룹의 전무였던 네스트로 라파넬리(Nestro Rapanelli)를 후임 경제장관으로 임명하고 B.B그룹에 의해 기획된 경제정책을 계속 추진토록 하고 대통령 자신은 경제정책 추진 과정을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라파넬리 장관의 독주에 대한 페론당 내부의 반발과 함께 고정 환율제도와 물가안정 기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89. 12 메넴 대통령은 라파넬리 경제장관을 해임하고, 자신이 라 리오하(La Rioja) 주지사 시절 주경제장관을 역임하고 당시 사회보건부 장관을 지내고 있던 에르만 곤잘레스(Erman Gonzalez)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하여 친정체제하에 경제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곤잘레스 장관의 취임 후에도 환율과 물가가 계속 상승하고 외채가 600억 불로 증가하면서 89. 12월말에는 환율이 가파르게 상승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메넴 대통령은 90. 1. 1 국내화폐의 가치보전과 물가억제를 위해 환율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변동환율제 채택과 예금동결조치에 이어 90. 1. 15에는 국영기업의 대폭 민영화와 중앙은행 소유 부동산 매각 및 정부기구 축소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긴급 경제조치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어서 2. 18에는 대기업 생산제품의 가격통제, 세금 납부기한 단축 및 주정부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 등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단행함으로써 환율을 달러당 2,000 아우스트랄 선에서 안정시키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또한 메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경제·사회안정에 암적 존재였던 노동연맹의 횡포를 막기 위해 노동연맹을 3분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고, 노조의 빈번한 파업으로 경제와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조의 파업을 제한하는 입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의회를 지배하고 있던 페론주의자들의 반대로 의회통과가 어려워지자 메넴 대통령은 동 입법안을 철회하고 대신 파업을 엄격히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공포함으로써 전화, 전기, 철도 등 공공부문 종사자들의 파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환투기 현상이 계속되고 특히 금융기관에 의한 환투기 현상이 빈번해지자 3. 4에는 중앙은행의 재할인에 관한 사항은 사전에 경제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환전은 허가된 환전상에서만 취급하도록 함으로써 민간은행 및 개인의 환투기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였다.



또한 정부재정 적자의 주요 원인 제공자였던 국영 전화공사, 항공사, 철도공사, 도로공사 및 군대운영 기업 등 각종 국영기업을 국제입찰을 통해 우선적으로 민영화 추진함으로써(주로 외국기업이 참여), 외화확보 및 외채상환과 함께 해당기업의 효율적 운영을 통한 정부재정 적자 축소를 도모하였으며, 국내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던 국영기업노조와의 직접적인 마찰요인을 제거함으로써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국내정치와 사회 안정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전 행정부 시절부터 누적되어온 약 80억 불에 달하는 공채를 ‘BONEX공채’(달러표시 공채)로 대체 지불함으로써 공채지불의 사실상 연기라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IMF 등 국제금융기관과의 차관 도입협상을 타결하고 외국 채권은행단과는 외채 탕감 및 원리금 지불조건 개선 교섭을 진행시키면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약 70억 불의 외화를 확보하고 국내 환투기 방지 대책으로 환율 안정기금(월 1억 불)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고 환율 불안은 계속되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임금인상을 물가상승에 연동시키는 ‘물가지수연동제도’(Indexation)를 폐지하고 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수입관세율을 평균 22%에서 9.4%로 인하하였으며, 동 계획은 국제 및 국내금융계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받음에 따라 금리가 급격히 하락하고 외환시장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으며, 인플레도 전월에 비해 절반이하로 떨어지는 등 단기간내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안정을 바탕으로 까발로 경제장관은 1992. 1. 1을 기해 아래와 같은 추가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 신화폐명을 ‘페소’로 함.
- 현행 10,000아우스트랄을 1페소로 액면가격을 평가절하 함.
- 미화 1달러를 1페소로 하는 법정 고정환율제를 도입함.
- 완전태환제를 실시함.
- 구화폐인 아우스트랄을 신화폐 페소와 당분간 병행 통용하며 점진적으로 회수함.









아르헨티나 역사상 5번째의 화폐개혁에 해당되는 신화폐 페소의 통용은 과거의 경우와는 달리 물가 및 환율이 극히 안정된 상황에서 예정된 스케줄에 따라 별 문제점 없이 진행됨으로써 성공적인 경제조치로 받아들여졌다.






1991. 4 ‘까발로플랜’ 실시이래 아르헨티나 경제는 안정기반이 확고해져 가고 있었으며, 1988~1990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서 1991년도에는 5%의 실질성장과 년 84%의 인플레를, 1992년에는 6.5% 경제성장과 7%의 인플레를 기록하는 등 경이적인 물가안정 속에서 착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고인플레와 급격한 환율 상승의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외화를 투기 혹은 재산가치 보전수단으로 장농이나 해외 외국은행에 예금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던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까발로플랜’ 실시로 단기간내에 환율과 물가가 안정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메넴정부의 경제정책 수행능력에 대한 신뢰를 갖기 시작하였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글에 이어 쓰도록 하겠습니다.)


금융위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책 추천!